스스로 자초한 일격, 안방 축제의 들러리가 되다
굳게 닫혀 있던 골문은 상대의 날카로운 전술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뼈아픈 엇박자에서 허무하게 열려버렸다. 2026 월드컵 조별리그 A조 멕시코와의 맞대결은 결국 후반 5분 터진 치명적인 수비 실책 하나로 0-1 패배라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골키퍼 김승규와 수비수 이기혁의 동선이 겹치며 충돌했고, 손에서 미끄러진 공을 루이스 로모가 빈 골대에 가볍게 밀어 넣으며 균형이 깨졌다. 멕시코의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조차 “썩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준 건 아니지만, 상대의 실수 덕에 득점할 수 있었다”며 머쓱한 승리 소감을 남겼을 정도다.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만은 아니었다. 후반 42분 조규성이 골문 바로 앞에서 회심의 헤더를 날렸지만, 멕시코 수문장 라울 랑헬의 동물적인 반사신경에 막혔다. 이어진 세컨드볼 찬스마저 랑헬이 팔을 뻗어 기어코 걷어내며 동점골의 불씨를 꺼트렸다.
멕시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역사적인 승리다. 2022년 카타르 대회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완전히 씻어냈을 뿐만 아니라, 1970년과 1986년 안방에서 치른 월드컵에서 수도 멕시코시티의 아스테카 에스타디오를 벗어나면 승리하지 못했던 지긋지긋한 징크스(1970년 톨루카에서 이탈리아에 1-4 패배)까지 깨버린 값진 결과물이다. 조별리그 2연승으로 승점 6점을 확보한 멕시코는 남은 체코전 결과와 무관하게 조 1위를 확정 지으며 열광적인 홈팬들 앞에서 최소 2~3경기를 더 치를 수 있게 됐다. 반면 승점 3점에 머문 한국은 같은 날 애틀랜타에서 1-1 무승부를 거둔 체코와 남아공(각 승점 1점)의 추격을 뿌리치고 32강(이번 대회부터 48개국 확대 체제로 각 조 1, 2위 및 성적이 좋은 3위 8개 팀 진출) 티켓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태극마크 공백 무색하게 한 중거리포 한 방
상대의 압박에 고전하며 둔탁하게 흘러갔던 멕시코전의 중원 싸움을 지켜보며 자연스레 한 선수의 공백이 뇌리를 스쳤다. 지난달 미들즈브러와의 리그 경기에서 불의의 어깨 부상을 당해 이번 11월 A매치 명단에 합류하지 못한 백승호(28·버밍엄 시티)다. 공교롭게도 대표팀이 멕시코전에서 고배를 마신 즈음, 바다 건너 잉글랜드 무대에서는 백승호의 시원한 부활포 소식이 들려왔다.
부상을 훌훌 털어낸 백승호는 이달 2일(한국시간) 영국 버밍엄의 세인트앤드루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2026 챔피언십(2부) 18라운드 왓퍼드와의 홈경기에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다. 지난달 27일 17라운드 웨스트 브로미치 원정에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예열을 마친 그는 전반 31분, 특유의 전진성과 슈팅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상대의 볼을 과감하게 탈취한 뒤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지체 없이 오른발 중거리 슛을 때렸고, 공은 그대로 골망 오른쪽 구석을 시원하게 갈랐다. 부상을 딛고 만들어낸 자신의 올 시즌 정규리그 4호 골이었다.
절정의 폼, 그래서 더 짙어지는 아쉬움
버밍엄 시티는 전반 43분 터진 더마레이 그레이의 추가골을 묶어 후반 16분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친 왓퍼드의 추격을 따돌리고 2-1 승리를 거머쥐었다.
묵직한 중거리 슛 한 방으로 팀 승리의 물꼬를 튼 백승호의 경기 감각이 다시 궤도에 올랐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소식이다. 다만, 꽉 막힌 흐름을 전환해 줄 탈압박 능력을 갖추고 중원에서 날카로운 한 방을 찔러 넣어줄 전천후 자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대표팀의 현 상황과 맞물려, 잉글랜드에서 전해진 그의 쾌조의 컨디션이 묘한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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